나의 소중한 한 영혼 마태복음 18:6~14(신약 29면)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할렐루야~ 오직 예수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모든 선생님들과 친구들,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옆 사람과 악수 합니다.
너는 나의 소중한 한 영혼이야~
내가 너를 놓치지 않을게~
스포츠 중에는 골프, 양궁처럼 한사람이 하는 스포츠도 있고 축구나 농구, 배구처럼 여러 명이 함께 하는 스포츠도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하는 스포츠처럼 보일지라도 코치나 감독, 메니저와 같이 곁에서 돕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함께 한 팀을 이루어서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경기장에 나오는 선발 선수들이나 벤치에 있는 선수들, 감독, 코치의 결원이 생겼을 때는 팀이 휘청하게 됩니다. 팀에서는 어느 한사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팀이 우승을 하면 감독, 코치 뿐만 아니라 선발선수와 후보 선수 모두 그 영광을 차지하고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팀구성원들이 위아래의 차별이 없이 그 존재를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는다면 그 팀은 좋은 팀웍을 가지게 되고 훨씬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믿음이 깊은 사람도 있고, 막 예수님을 믿은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한 공동체를 이루고, 한 팀이 되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는 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 구성원에는 어느 누구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12절은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는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잃어버린 양은 믿는 형제를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는 그 대상이 세리와 창기, 죄인들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잃어버린 양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같은 비유이지만 각 비유에서 강조점이 다릅니다. 오늘의 본문의 강조점이 무엇인지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12절의 비유는 이렇습니다. 백마리의 양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라고 의문의 형태로 되어 있는데 찾는다는 것입니까 안 찾는다는 것입니까? 네, 찾는다는 것입니다. 목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목을 하는 민족이 아닙니까? 목자들은 양의 속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양은 근시가 너무 심해서 가까이에 동료 양이 있어야만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양들이 한여름에도 따닥따닥 붙어 있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살려고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자들은 한 무리였던 양 가운데,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양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위험한 곳에 갈 수도 있고, 또 맹수의 위협을 감지할 수도 없어서 공격을 피할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양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목자들이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모두가 끄덕끄덕 할수 있는 비유인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고 찾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도 기뻐하는 일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99과 1의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그리고 당연히 99가 더 많은 선택을 받을 것입니다. 더 크고 많고 중요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비록 1이라 하더라도 그 존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찾도록 찾을 만큼 귀한 존재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99마리의 양의 가치는 별로 없고 기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마리를 다시 찾는 것이 그렇게 기쁜 일임을 설명해 주는 비유입니다.
비유의 끝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하나라도 잃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너를 잃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다. 나를 잃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다.) 이것이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 공동체에서도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꼭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을 방해하는 사탄의 시험이 곳곳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사탄의 도구가 되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작은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은자는 연령이나 겉모습이 작은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가진 것이 적고 지위도 낮고, 신앙적으로는 아직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고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 약자를 의미합니다.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는 ‘발을 헛디디다’는 의미입니다. 발을 헛디디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게 됩니다. 심하면 넘어지고 다칠 수도 있습니다. 마음으로 비유하면 마음에 상처를 입고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멀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족하다는 의미에 실수하다, 큰 과오를 범하다, 그릇된 길로 들다, 타락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잠깐 마음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실족하여 범죄하고 타락하여 결국은 잘못된 길로 가게 되는 경우에도 실족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누가 실족한 사람입니까? 공동체의 대열에서 이탈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소외된 사람입니다. 제외되어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입니다. 공동체에 있어야 하지만 지금 공동체를 떠나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믿음에서 실족하게 된 것도 심각한 문제인데, 작은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벌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자는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는 형벌을 받는 것보다 더한 형벌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면 살 수 있을까요? 실제로 로마에서 행해진 형벌이라고 합니다. 사형에 처해진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이런 큰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8~9절에도 손이나 발이나 눈이나 그것으로 잘못하면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데 그러느니 차라리 이 죄를 끊어 내기 위해 팔다리 눈이라도 잘라내고 장애있는 모습으로 지옥에 가지 않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났다고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손이나 발이나 눈으로 범하는 이 죄악이 아마도 1회성이 아니라 다회성, 습관적인 죄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죄만 짓는 육체라면 차라리 잘라내고 나머지만으로라도 천국에 가는 것이 나은 일이라고 그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약자에게 범죄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반복적인 사악한 죄가 하나님 앞에 결코 설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의이건 고의가 아니건 이러한 범죄로 믿음이 약한 자가 믿음을 잃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엄중한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실족시키지 않아도 마귀가 항상 실족케 하는 일들을 만드는데, 우리는 그런 일들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나서 누군가가 잃어버린바 되었다면 그 사람이 믿음 안에 다시 돌아오도록 찾도록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나 자매를 실족하게 한 죄가 있다면 단순한 회개로 끝내지 말고 다시 그 사람을 믿음 안으로 찾아 오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잃어 버진 한 마리 양을 찾아 오듯이 말입니다.
우리 예수 세대에도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자리에 없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지금 보이지 않는 그 친구들이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찾아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우리 모두의 기쁨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 친구들이 예배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님의 반대일 수도 있고, 사춘기의 방황일 수도 있습니다. 아르바이트나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잠시 예배를 접어둔 친구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친구들이 돌아오기까지, 우리가 끊임없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작은 관심 하나가 그 친구들의 마음을 녹일 수도 있고,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믿음 안에 돌아오게 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해, 그 친구를 위해 오늘 그의 마음을 녹일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친구를 위해 시간을 정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따뜻한 초청의 톡하나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전화를 하고, 만나고, 내가 아직 너를 기다리고, 우리 예수님도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그 친구가 다시 돌아오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잃어 버린 친구들이 다시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게 되는 것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 시간 우리 반별로 함께 앉아 보겠습니다.
함께 기도:
1.이 자리에 없는 친구를 위해서
2.서로 서로 돌보고 세워주는 존재가 되도록
3.우리 선생님이 좋은 목자가 되시도록
우리 반 중에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없는 친구들이 있습니까? 특별히 중학교때는 함께였는데 고등학교에 와서는 보지 못한 친구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그 친구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찾고 계심이 들려지게 해달라고 주님께로 돌아와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 하기 원합니다.
만일 특별히 그런 친구가 없는 반은 함께하고 있는 우리가 서로를 잘 돌보고 실족하지 않게 세워주는 존재가 되어 함께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우리 선생님께서 도와 주시고 우리를 더욱 사랑으로 말씀으로 이끌어 가 주시도록, 선생님이 우리를 결코 놓치지 않는 좋은 목자가 되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 나를 소중히 여기신 것처럼, 오늘 이 자리에 있지 않은 친구들도 귀히 여기심을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를 통해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 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가 먼저 그 친구에게 다가가고, 먼저 연락하고, 먼저 손 내밀어 잡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또한 지금 함께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굳건한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선생님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씀과 사랑으로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거룩한 주님의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생님들의 많은 기도 제목들도 응답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 예수 세대가 잃어버린 한 영혼이 돌아올 때,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워, 우리도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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